Director's Note · 소장 노트 04
2026. 7. 31.

냉정한 법은 잠자는 자를 깨우지 않는다

— 나는 따뜻한 법을 만들고 싶다

법학의 표준적인 연구 방법은 주로 해석론이다. 조문을 읽고 판례를 찾아, 눈앞의 사실관계를 그 범주 안에 재구조화하고 결론을 끌어내는 일. 도그마틱이라고도 부른다. 최근에는 외국의 입법과 판례를 견주어 시사점을 얻는 비교법 연구도 활발하다. 법학자의 훈련은 대체로 이 두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이 길을 아주 유창하게 걷는 사람은 아니었다.

전에 근무했던 정책연구기관에서 나는 경제학자, 행정학자들과 한 팀으로 일했다. 그들과 소통하려면 조문을 읊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 제도를 도입하면 비용이 얼마나 들고 편익이 얼마나 생기는지 — 비용편익분석에 기초한 이른바 법경제학의 언어를 그곳에서 익혔다. 최근에는 실제 데이터와 통계에서 문제를 확인하고 대안을 찾아가는 실증적 방법도 쓰게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좋은법연구소를 세운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법이 실제 사회에서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가'라는 실천적인 물음이었다. 이런 물음은 어찌 보면 그들과 한 협업의 결과이다. 그들은 반복적으로 나에게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지를 물어댔다. 난 반사적으로 비법학자의 관점을 훈련받은 셈이다. 책 속의 법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법을 보겠다는 것 — 말하자면 나는 지금 법사회학(Sociology of Law)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솔직히 말하면, 한때는 이런 내가 좀 모자라다고 생각했다. 정통의 도그마틱을 능란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것이 결함처럼 느껴진 적도 있다. 선배 법학자들로부터 도그마틱에 의한 공격을 받으면 쉽사리 위축되고는 했다.

나의 지난 법학자의 삶에 또 하나의 장면이 따라온다. 법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도움을 청해 오는 일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법은 어렵고 다가가기 힘든 것이니까. 특히 소송을 해야 할지 판단이 필요할 때, 나는 대개 이렇게 답해 왔다. 법으로 무언가를 다투고 확인받는 일은 정말 오랜 투쟁과 같다고. 사람의 에너지를 모조리 소진시키고,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나 하는 의구심이 지속적으로 올라올 것이라고. 그 소모적인 시간을 견딜 자신이 있고, 그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반드시 얻어내야 할 것이 있다면 진행하되, 그렇지 않다면 적당한 타협이나 조정을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런데 그 말을 할 때마다 알 수 없는 패배감이 들었다. 법은 최후의 보루라지만, 정작 보루가 필요한 순간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법은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보호하지 않는다(Vigilantibus non dormientibus jura subveniunt). 뒤집어 말하면, 법을 잘 모르는 약자를 법이 먼저 찾아가 깨워 주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 사실이 가끔 나를 몹시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법학이 세상에 눈을 감은 것처럼 보일 때, 그 무력감이 미움으로 번진 적도 솔직히 있다.

이런 기억들은 내 무의식 속에서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 공부의 출발점은 언제나 두 개의 물음이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데?" 그리고 "그러면 뭐가 달라지는데?" 앞의 물음은 제도의 근거를 캐고, 뒤의 물음은 제도의 효과를 캔다. 법전은 이 두 물음에 스스로 답하지 않는다. 답은 법전 밖에 있다. 예산서와 결산서에, 통계에, 그 법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있다.

그리고 나는 확신한다. 법이 먼저 찾아가지 않는다면, 법을 아는 사람이 먼저 찾아가야 한다. 법학 지식을 기준으로 본다면 그들은 일종의 약자다. 먼저 찾아가는 일은 그 약자에 대한 배려다. 약자에 대한 배려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미덕이 아닌가.

법이 먼저 찾아가지 않는다면, 법을 아는 사람이 먼저 찾아가야 한다.

데이터를 읽어 문제를 드러내고, 그것을 보통의 언어로 옮기는 것, 단순히 정보의 '공개'에서 멈추지 않고 정보의 손쉬운 '활용' 플랫폼을 제공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법학자라는 지식인이 할 일이다. 좋은법연구소는 그 시작이다.

지난 한 달, 세 시·도의 결산서와 공시 자료를 뒤져 현안노트 세 편과 총괄편을 썼다. 조문 해석만으로는 보이지 않던 구조가 숫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구조를 다시 법의 언어로 옮겨 입법 대안까지 잇는 것. 그것이 이 세상에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하는 법학이라는 확신이 이제는 든다.

나는 모자란 것이 아니라 좀 다른 사람이었다. 좀 다른 법학자였다. 좀 다르면 어떠한가. 무기력은 방향을 바꾸면 동력이 된다. 냉정한 법이 깨우지 않는다면, 먼저 찾아가 깨우는 법 — 나는 그것을 따뜻한 법이라 부르고 싶다. 그리고 그 다름이 이 연구소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다.

※ 이 글은 연구소의 공식 견해가 아닌 소장 개인의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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